신구약 중간사 요약 정리
(이 자료는 jorc9114.tistory.com에서 발췌한 인터넷 자료입니다)
제 1 부 역사적 배경
1. 페르샤 통치 하의 유대인
북왕조에 속한 자들과는 대조적으로 남왕조에 속하였던 유대인들은 포로 기간 동안에 국제 결혼을 거부하고 이방세계 속에서도 구별된 공동체들을 형성함으로써 그들 특유의 동질성을 고수했다. 그들은 모세의 사상과 선지자들의 교훈, 특히 그 기간을 위하여 기록되어진 이사야의 교훈에 착념하여 그들의 행동규범을 삼고자 노력하였다.
이러한 종교 활동의 결과 하나님의 계시가 저장된 책을 수호하려는 조그마한 유대인의 핵심단체가 형성되었고, 그리하여 바벨론은 유대교의 사상을 유지하고 전파하는 중요한 중심지가 되었다.
B.C. 457년 에스라는 바벨론에서 되돌려 받지 못하였던 성전 기물들을 가지고 1,700명의 유대인과 함께 귀국하였다. 그는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유대인들이 이방인들과 가나안의 여자들과 통혼함으로써 모세의 율법을 범하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고, 제사장들을 설득하여 그들의 이방인 아내를 고향으로 보내는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후에 느헤미야는 똑같은 일을 다시 해야만 했다.
구약성경이 종결되었던 무렵(B.C. 400년경)까지 138년간 유대는 페르샤에 예속된 하나의 주였으며, 유대인들은 페르샤제국을 이루었던 128개 주 전역에 분산되어 살았다. 페르샤는 140년이 넘도록 세계를 제패한 국가였고, 그 가운데 유대인들이 가장 넓은 영역에서 관대한 처우와 흡족한 역할을 영위할 수 있었던 B.C. 5세기의 페르샤 왕들은 그의 통치 밑에서 예루살렘 성곽을 재건하였던 아닥사스다 1세와 단 일 년 동안 치리하였던 크세르크세스, 다리오 2세였다.
이미 바벨론의 통치시기에 유대인들은 옛날의 고전적 히브리어 대신에 제국 아람어를 사용하였다. 아람어는 바벨론의 산간 지방에서 사용된 셈족 언어이며 수리아족 방언이었고 히브리어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2. 알렉산더 대제와 유대인
알렉산더 대제의 부친인 마게도냐의 필립은 헬라 문화에 대한 상당한 긍지를 가졌고 그래서 그의 아들인 알렉산더를 심마쿠스라는 선생에게 맡겼고, 그는 알렉산더에게 호머의 일리어드를 알게 해 주었다. 알렉산더가 13세 되었을 때 위대한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스승이 되었고, 그는 그로부터 그리스 문학과 예술을 배우고 이해하게 되었으며 그리스 종교와 문화, 문명에 대한 대단한 존경심을 갖게 되어서 결국에는 헬레니즘의 사도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알렉산더는 약관의 나이에 아버지의 왕위를 계승하였고, 일 년에 걸쳐 그리스 여러 도시 국가들과 전쟁을 하여 그들의 항복을 얻어 냈다. 그는 페르샤군을 격퇴시키고 방향을 지중해의 동편 연안 도시들로 돌렸고, 시돈과 비블리스, 아라두스를 정복하였고, 7개월간의 전투를 거쳐 두로를 정복하였다.
알렉산더는 예루살렘을 정복하려던 중 당시 제사장이었던 야두아가 그를 맞아 그가 그리스 최초의 왕이 되어 페르샤 제국을 정벌하리라는 예언이 기록된 다니엘서의 구절들을 보여 주었고, 그는 이것이 자신에 대한 예언임을 믿게 되어, 이후 알렉산더는 유대인의 친구가 되었다. 332년 그는 애굽을 침략하였고, 331년에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를 설립했고 그곳에 동지중해의 상업적 대도시였던 두로를 능가하는, 그리스의 상업적 이익을 촉진시키는 훌륭한 항구를 설치하였다.
이전 페르샤의 모든 지역을 평정한 알렉산더는 동양과 서양의 사람들을 하나로 합하려는 그의 계획들을 진행시켰는데 그는 아시아에 유럽인의 식민지를 세우고 유럽에 아시아인의 식민지를 세워 서로 다른 민족 간의 국제결혼을 진작시킴으로써 이 계획을 실행하길 원했다.
알렉산더의 정복 사업이 가져다준 중요한 결과 중의 하나는 유대인의 광범위한 분산인데 이것은 기독교의 전파를 예비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알렉산더는 그가 설립한 많은 도시들에서 유대인들이 거주하도록 하는 호의를 보여 주었는데, 유대인은 중국에 이르는 아시아 전역에서 발견될 수 있었을 것이다.
3. 프톨레미 왕조와 유대인
B.C. 323년 알렉산더는 죽으면서 자기의 자리에서 제국을 통치하기에 충분한 나이의 계승자를 남기지 않았다. 그가 죽은 후 그 아내 록산나에게서 한 아들이 태어났지만 이미 그의 제국 안에는 그의 계승자가 되기를 원하는 많은 친가와 처가 사람들이 있었으며, 심지어 그가 장사되기도 전에 그의 왕국을 소유하고자 하는 자들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알렉산더의 후계자들은 그의 제국을 소유하기 위한 경합을 벌였다. 그 중에서 록산나와 그녀의 아들을 죽인 카산더, 그리고 리시마쿠스는 제 2의 알렉산더가 되려는 안티고누스의 음모를 분쇄하기 위한 동맹을 맺었다.
결국, 라구스의 아들인 프톨레미에게는 애굽이, 리시마쿠스에게는 수리아가, 셀류쿠스 니카터에게는 바벨론의 속주들이 할당되었다.
프톨레미는 B.C. 320 애굽을 침공하였고, 예루살렘은 안식일에 공격을 받아 저항 없이 정복당하였고, B.C. 315년에는 프톨레미의 적수인 안티고누스에게 넘어갔으나 가사 전투 이후에는 프톨레미가 다시 그것을 회복시켰다.
당시 프톨레미와 연합세력을 형성하였던 셀류쿠스는 스스로 바벨론의 군주가 되었다.
B.C. 312년은 유대인들 가운데 오랫동안 사용되었던 달력이 시작되는 셀류키드 제국의 개국을 맞았고, 301년의 입수스 전투에서는 안티고누스가 피살되어 프톨레미 1세가 팔레스틴을 장악하게 되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페르샤의 지배하에서 자유스럽게 생활하고 자기네의 종교와 문화적 전통을 행사하도록 허락받았던 것과 동일한 자치권을 누렸고, 중앙정부는 오직 세금징수에만 관여하였고 기타의 내정에는 간섭하지 않아, 대제사장은 페르샤의 통치하에서 행사하였던 그대로 지역사회의 일들을 관장하도록 허락받았다.
프톨레미 왕조의 통치 동안에 애굽은 헬라 세계의 가장 중요한 지(智)적인 중심지 중의 하나가 되었다. 애굽의 알렉산드리아는 학자들의 정착지이며 학문의 커다란 중심지가 되기 시작하여 박물관과 도서관 때문에 연구차 모여든 학생수가 14,000명을 넘은 적도 있다고 한다.
319년에서 198년까지 팔레스틴은 프톨레미 왕조의 지배하에 놓였다. 비록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고는 있었지만 애굽과 팔레스틴에서 살고 있던 유대인들에게는 이 시기가 좋은 기간이었지만 프톨레미 왕조와 셀류키드 왕조 사이의 계속된 전쟁의 와중에서 팔레스틴의 유대인들은 수난을 당하였다.
차 례
제 1 부 역사적 배경
1. 페르샤 통치 하의 유대인
2. 알렉산더 대제와 유대인
3. 프톨레미 왕조와 유대인
4. 셀류쿠스 왕조 하의 유대인
5. 마카비가(家) 통치 하의 유대인
6. 하스모니안 왕조 하의 유대인
7. 로마 통치 하의 유대인
7.1. 이두매 왕조
7.2. 헤롯 대왕
7.3. 헤롯 대왕의 아들들
7.4. 로마의 총독들
7.5. 헤롯 아그립바 1세
7.6. 헤롯 아그립바 2세
7.7. 제2기의 총독들
7.8. 유대인의 반란(A.D. 66~70)
제 2 부 종교적 배경
1. 바리새파
2. 사두개파
3. 에세네파
4. 열심당
5. 마카비가(家) 통치 하의 유대인
제 3 부 중간사 시대의 유대문헌
1. 히브리어 구약성경의 헬라어역
2. 사해 동굴에서 발견된 문헌들
3. 외경과 위경
4. 요세푸스와 그의 저작들
4. 셀류쿠스 왕조 하의 유대인
셀류키드 왕조의 시조는 알렉산더 대제의 장군들 중의 하나인 셀류쿠스 니카터였다. 그는 군사적인 정복에 의해 헬레스폰트와 지중해 연안에서 동쪽으로 인더스 강에 이르는, 이전 알렉산더 제국의 넓은 국토를 장악할 수 있었다.
321년에 그는 바벨론의 방백으로 임명되었으나 316년에 프리기아의 통치자인 안티고누스에 의해 축출되었으나 301년 입수스 전투 후에 다시 그는 수리아와 소아시아를 할당받았다. 이때부터 셀류키드 시대가 시작되었으며 마카비1서와 어떤 역사서들은 그들의 역사적 사건들을 이 기원에 따라서 연대를 계산하고 있다.
셀류쿠스 1세 이후 탁월한 셀류키드 왕조의 왕 중에 안티오쿠스 3세 황제가 들어간다. 팔레스틴은 198년 파네아스 전투를 통해 프톨레미 왕조의 통치에서 수리아의 셀류키드 왕조의 통치 밑에 예속되게 된다.
안티오쿠스의 초기 통치 기간에는 유대인들이 그들의 관습대로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며 세금을 징수당하지 않는 것을 포함하여 많은 특권과 호의를 누리며 번영하지만 이후 안티오쿠스가 로마군과의 서머나 전투에서의 패배로 인해 무거운 배상금을 부과 받게 되면서 나라 안의 모든 신전의 재산들과 예루살렘 성전의 재산까지 압류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유대인들과의 마찰을 빚게 되었다.
이것은 그 후 세류쿠스 4세의 통치 시기에도 동일했고, 셀류쿠스 4세를 이은 안티오쿠스 4세의 집정기에 이르러 절정에 이르게 된다.
안티오쿠스 4세는 전형적인 동양의 왕으로 행세하였으며 기만술과 가장함과 숙달된 통치를 행했다. 이 시기에 팔레스틴은 제사장직을 뇌물을 통하여 사들이는 이들이 발생했고, 안티오쿠스 4세의 헬라화에 적극적인 자들의 충성으로 인해 곳곳에 체육관과 경기장, 대중목욕탕 등이 생겨났다. 그러자 경건한 유대인들 사이에는 강한 반발심이 일어나게 되었다.
안티오쿠스 4세가 애굽과 전쟁을 수행하고 있을 동안, 뇌물에 의해 자신의 대제사장직을 상실한 야손은 무력으로 자신의 자리를 찾고자 했고, 이 보고를 접하게 된 안티오쿠스 4세는 격노하였고 군사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진격하여 피의 보복을 자행하였다.
그는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 약탈을 했고, 황금제단과 모든 봉헌된 기명들과 기구들을 다른 보물들과 함께 노략하였다. 무거운 세금을 유대인들에게 부과하였고, 추수곡식의 삼분의 일, 추수 열매의 절반, 사해에서 얻어지는 소금에도 세금을 징수하였다.
안식일 준수와 할례의식, 부정한 음식의 금지와 같은 특징적인 유대인들의 관습들이 사형에 해당하는 죄목으로 금지되었고, 그리스 신과 여신들에 대한 숭배를 강요하였다.
유대인들은 환난의 때를 겪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힘과 잔학한 행위가 그들의 신앙을 꺾지 못하였고 그들은 이교의 헬레니즘이 감행한 맹공격에 끝까지 저항하였다.
이러한 반대 세력은 서기관들에 의해 형성되고 앞장 세워졌다. 그들은 정통적이고 율법적이며 매우 엄격하였고, 이 집단은 처음에는 소규모였으나 전국의 마을과 성읍들로 확산되었고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것을 의식적으로 회피했다. 그들은 점진적으로 유대인을 헬라화 하려는 움직임에 대한 강력한 반대세력이 되었고 반수리아적 활동을 격렬하게 전개했다.
하시딤, 즉 경건한 자 혹은 구별된 자로 알려진 바리새파는 바로 이 집단에서 형성되어 나왔고, 그들은 자신들의 종교를 위하여 기꺼이 핍박과 순교를 감내하였으며 선조들의 신앙의 도리를 고수하는데 충실하였다.
5. 마카비가(家) 통치 하의 유대인
헬라화 정책에 대한 유대인의 반대는 마침내 마카비 일가가 주도하는 공공연한 반란으로 발전되었고, 이 반란은 완전한 정치적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단호한 투쟁으로 격화되었다.
아스모니안 계열의 마타디아스는 이방신을 위한 제단에서 제사를 드리라는 명령을 받고 이에 불복하여 지방 수령을 죽이고 그의 아들과 함께 반란 운동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에 의해 시작된 이 독립 운동은 그의 사후 그의 아들들에 의해 계속적으로 이루어졌는데, 먼저 그의 아들 유다(마카비우스라는 별명을 가짐)에 의해 조직적이고도 광범위한 독립운동이 이루어졌다. 유다는 로마와의 평화 협정을 꾀하는 동시에 조직적인 군대를 조직하여 대항하였다. 그러나 그는 결국 2만의 보병과 2천의 기병을 갖춘 압도적인 수리아 병력과의 전투에서 전사하게 되고, 그의 자리는 동생 요나단이 맞게 되었다.
요나단은 게릴라전을 통해 예루살렘만을 남겨두고 중요한 요새를 하나씩 수리아군으로부터 탈환해 나갔고, 급기야 수리아로부터의 화친조약을 이끌어내기까지 했다.
그러나 요나단은 수리아 내의 분쟁이 요인이 되어 수리아 장군 트리포의 계략에 말려 무참하게 살해당하였고, 그의 형제 시몬이 그 뒤를 잇게 되었다. 시몬은 당시 강대국으로 급부상하고 있던 로마와의 평화 협정체결을 위해 사자를 파견하고, 유대 지방의 영토에 대한 완전한 통치를 확보하였다.
그러나 그도 역시 반역자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므로 마카비가의 다섯 형제의 영웅적인 헌신과 투쟁은 시몬의 죽음과 함께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6. 하스모니안 왕조 하의 유대인
시몬의 죽음 이후 살아남은 그의 아들 요한 힐카누스는 수리아가 정치적 혼란기를 맞은 틈을 타서 독립을 되찾고 나라를 통치하게 된다. 그는 주화에 자기의 이름을 새겨 넣은 최초의 유대 군주가 되었고, 정치적 견해 차이로 인해 하시딤들과 마찰을 가졌는데 이 과정에서 바라새, 사두개, 에세네 등의 분파가 생기게 되었다.
그가 죽은 이후 그의 아들 아리스토불루스 1세가 통치하면서 보다 더 친 헬라적인 정책을 폈고, 그의 사후 그가 생전에 구금시켰던 그의 동생 알렉산더 얀네우스와 결혼한 그의 아내 알렉산드라에 의해 알렉산더 얀네우스가 왕위를 이었고, 그에 의해 하스모니안 왕조 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지는 등 왕권이 절정에 달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통치 기간에 있었던 바리새인들의 반란과 반대세력들에 대한 무자비한 숙청으로 원성을 샀고, 결국 그는 죽으면서 자기 아내에게 바리새인들과 함께 할 것을 충고했다. 그의 뒤를 이은 그의 아내 알렉산드라는 친 바리새적인 정책을 폈고, 이로 인해 시몬의 통치 기간 중에 누렸던 행복하고 번영하는 시대를 회복할 수 있었다.
그녀의 뒤를 이은 사람은 그녀의 생전에 대제사장에 임명되었던 힐카누스 2세였지만 그는 권력을 찬탈하려는 알렉산드라의 아들 아리스토불루스 2세에게 패하게 된다. 그러나 이두매의 왕이었던 헤롯 대왕의 아버지 안티파터의 도움으로 반란을 진압하고 아리스토불루스 2세를 구금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계속된 알렉산드라의 아들들의 반란으로 인해 결국 로마에 도움을 요청하게 되고 이 일을 계기로 하여 로마는 팔레스틴에서의 정치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7. 로마 통치 하의 유대인
유대의 역사에 있어 로마의 통치 기간은 B.C. 63년에 시작되어 A.D. 70년 예루살렘의 멸망과 성전의 파괴에서 끝이 난다.
로마의 통치 기간은 크게 다섯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두매 왕조, 첫 지방 총독, 아그립바 1세의 통치, 두 번째 지방 총독, 유대인의 반란으로 구분할 수 있다.
7.1. 이두매 왕조
프톨레미의 왕당파에 속했던 안티파터는 씨저의 호의를 얻어 유대의 총독이 되자, 그의 지위를 확고히 하고 자신의 아들인 파사엘을 유대군의 사령관으로, 헤롯은 갈릴리의 분봉왕으로 삼았다. 씨저의 사후 그들은 다시금 가이사(Cassius)에 협력하여 그의 호의를 얻게 되어 헤롯은 수리아 전역의 총독으로 임명 되었다가, 결국 로마의 도움을 받아 모든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B.C. 24년에 단독으로 유대의 왕이 된다.
7.2. 헤롯 대왕
왕이 된 헤롯은 로마에서 누가 실권을 행사하든지 로마에 충성하였고, 유대인에게 강하고 유력한 정부를 수립하였다. 악티움 해전 이후 헤롯은 자신의 가치를 인정해준 아우구스투스에게 충성하였고, 결국 팔레스틴 전역을 다스리는 왕이 될 수 있었다.
그는 반대자들을 치밀하게 제거하였고, 대부분의 산헤드린 공회원들도 그에 의해 제거 되었다.
헤롯은 그리스-로마 문화의 대단한 숭배자였고, 많은 건물들을 건축하였으며 특히 B.C. 20~19년에 그는 스룹바벨 성전이 주변의 새 건물들에 비해 퇴락하였다 하여 성전 재건에 착수하였다. 그는 11년간 평화를 구가하였으나 마지막 10년간은 다시 정권 쟁취를 위한 가족 내의 암투에 시달리게 된다.
그의 사후 그의 왕국은 그의 세아들, 아르켈라우스, 헤롯 안티파스, 헤롯 빌립에 의해 각각 분할되어 유대, 갈릴리와 베뢰아, 트라코니티스와 인근 지역으로 나뉘어 통치되게 된다.
7.3. 헤롯 대왕의 아들들
아르켈라우스는 유대와 사마리아, 이두매의 분봉왕으로 처음부터 호평을 받지 못해 자신의 통치 지역에서 일어난 폭동과 헤롯이 남긴 복잡한 문제들, 이혼한 여인과의 결혼 등으로 인해 혐오감을 샀고 결국 그는 로마인들에 의해 고울 지방으로 추방되게 된다.
헤롯 안티파스는 갈릴리와 베뢰아의 분봉왕이었고 신약에서 세례 요한과 관련되어 여러 번 언급되는 인물이다. 헤로디아와의 불법적인 결혼으로 인한 세례 요한의 지적으로 그를 투옥하고 참수한 인물이며 빌라도에 의해 보내진 예수님을 심문한 왕이기도 하다. 그는 권력욕에 의해 로마에 갔다가 오히려 왕위를 박탈당하고 추방된다.
7.4. 로마의 총독들
로마의 총독들은 주로 로마를 위한 재정 대리인이었고, 그의 직무는 로마 정부가 부과한 세금의 징수와 그곳에 주둔한 군대의 통솔, 그리고 중요한 사건의 재판 등이었다.
유대는 원로원에 속한 속주가 아니라 씨저에 속한 속주였기 때문에 징수된 세금은 직접 씨저에게 보내졌다. 많은 유대인들이 세금 징수에 종사했는데 이들은 어느 정도 더 징수하여 초과된 금액을 자신들이 가질 수 있었고, 외세에 협력하는 자들이라 하여 유대인들의 미움을 받았다.
7.5. 헤롯 아그립바 1세
헤롯 안티파스가 A.D. 39년 왕위를 박탈당하고 추방된 뒤에 그의 뒤를 이어 헤롯 아그립바 1세가 왕이 되었다. 그는 로마에서 투옥 되었다가 친분을 쌓았던 칼리굴라가 황제가 되면서 유대의 왕이 되었고, 특별히 바리새인들의 지지를 받았으며, 헬레니즘의 숭배자였고, 그리스 로마적 향락에 탐닉하였고, 결국 A.D. 44년 질병으로 인해 사망하게 된다.
7.6. 헤롯 아그립바 2세
아버지 헤롯 아그립바 1세의 뒤를 이은 그는 아버지의 영토가 아닌 레바논 지방의 콜키스 지역을 분배받게 된다. 그러나 네로에 의해 갈릴리 부근과 윗 요단을 포함하는 지역과 베뢰아의 율리아스란 도시를 다스게 된다. 사도 바울은 바로 그의 재판에 참석하게 된다.
7.7. 제2기의 총독들
A.D. 44~66년 사이에 팔레스틴의 총독들은 모두 7명으로 파두스, 알렉산더, 쿠마누스, 벨릭스, 베스도, 알비누스, 플로루스 등이다.
헤롯 아그립바 1세가 죽은 후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팔레스틴을 총독의 통치 아래 두었고 이 기간 동안은 대단한 고통과 압제의 날들이었다.
이 기간 동안 유대에는 세 부류의 적대적인 당파들이 있었는데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율법적인 생활에 보다 광적이었고, 열심당은 팔레스틴에서 로마를 축출하려 했다. 이 시기의 유대는 로마에 대한 반란과 사마리아인들과의 전투를 치렀으며, 로마와의 대대적이고도 피어린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7.8. 유대인의 반란(A.D. 66~70)
열심당의 혁명적인 활동의 결과 유대인들은 로마와 로마적인 모든 것에 반대하는 증오심을 갖게 되었고 결국 이것은 총독 플로루스의 통치시기에 터져 나오게 된다.
총독이 성전의 보물창고에서 일부를 약탈하자 유대인들은 이를 모욕으로 간주하였고, 헤롯 아그립바 왕의 중재 노력에도 불구하고 반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로마제국은 유대에서의 반란을 진압하고자 베스파시안 장군을 파견했지만 도중 네로의 사망으로 인해 그는 로마로 회군하여 황제가 되었고, 그 후 자신의 아들 티투스(Titus)에게 4개 군단을 맡겨 예루살렘으로 출정시켰고, 결국 4개월 만에 예루살렘은 함락되고 성전과 도시는 파괴되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유대교의 동질성 상실을 가져왔고, 성전 제사는 중단 되었으며 유대교의 영향력 있는 계급이었던 제사장직은 소멸되게 되었다. 또한 또 다른 영향력을 행사했던 산헤드린 역시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다시는 등장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후 다양한 독립 회복을 위한 시도들이 있었으나 모두 실패하게 되고 팔레스틴은 이교도가 번성하였고 팔레스틴 유대교는 1948년 이스라엘의 국가 건설 때까지 종식되게 되었다.
제 2 부 종교적 배경
1. 바리새파
바리새란 명칭이 최초로 사용된 때는 요한 힐카누스가 통치하였던 B.C. 135년이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바리새파의 유래를 그보다 훨씬 이전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들은 율법이 완전히 준수 될 때 메시야가 강림하시며 유대인들이 적국의 통치로부터 해방될 것이라고 가르쳤고, 자신들의 전 재산의 십일조와 이방인들이나 다른 파에 속한 평민들과의 교제를 거부했고 이방인들과의 통혼을 엄격하게 금지하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복장으로 다른 파와 구별하였는데 송아지 가죽으로 만든 경문이 이마와 손목에 매어졌고 경문의 가죽 주머니에는 “이스라엘아 들으라”는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이 적혀 있었고, 유대인의 거의 모든 계급에서 그 구성원을 취하였다.
바리새파 서기관들은 세대를 계승하면서 그들이 계발하고 전승시켜온 규례들이 준수되어야 한다는 극단적인 주장을 하였고, 사두개파와는 반대로 구전을 옹호하였다.
그들은 구약성경을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으로 받아들였으나 풍유적 해석법을 사용하여 그들의 전승까지도 구약과 동등하게 취급하였다.
신약성경에서 언급된 그들의 모습은 안식일을 준수하고, 길게 기도하며, 불필요한 십일조를 바치고, 자주 금식하며, 그들의 경문을 넓히고, 여러 가지 의식상의 결례를 많이 행하고 자만하며 탐욕스럽고, 시장에서 인사 받고, 랍비라 불리는 것을 좋아하며, 회당과 연회에서 스스로 상석에 앉고, 자기들처럼 행하지 않는 모든 사람을 경멸하는 자들로 나타나 있다.
2. 사두개파
사두개란 명칭의 기원에 대하여는 다양한 견해가 있으나 이들은 유대 종파들 가운데서 두 번째의 중요한 종파였다. 이들은 구전 율법을 주장하였지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유전은 용납하지 않았고, 육체의 부활과 영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
종종 이들에 대한 명칭은 외국의 사상을 좋아하고 보통의 유대인에 의하여 지켜지는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자들을 지적하는 자들을 일컫는데 사용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A.D. 60-70년 사이의 대제사장은 항상 사두개인이었으며 이들은 지배계급에 머물러 있었고, 성전을 본거지로 사용했다.
3. 에세네파
이들은 바리새파보다 더욱 극단적인 원래적 종파에 속하고 동양과 그리스의 철학의 영향으로 그 성격이 완만해졌다고 하는 마카비 시대보다 더 엄격했던 하시딤의 후예라는 견해도 있지만 요세푸스에 의하면 이들은 마카비가의 요나단의 때에 활동적이었다고 전해진다.
이들은 주로 금욕주의를 실천하고 성격상 은둔적인 종교집단이었다고 알려져 있고, 이들의 숫자는 예수님 당시 약 4천명 정도였으며, 예루살렘과 유대의 몇 마을, 사해의 서쪽 해안에 있는 엔게디에 주로 거주했다고 한다.
이 파에 가입하려는 자들은 이들이 세 개의 상징, 곡괭이와 앞치마, 흰 옷을 받아 1년간의 견습 기간을 거치고 다시 2년간의 견습을 통과한 후에 공동체원으로 인정받았다고 한다.
이들은 바리새인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외에는 그 어떤 왕도 인정하지 않았고, 대부분 독신생활을 했으며, 한 사람의 청지기에 의해 공동기금을 조성하여 생활하였다. 노예가 없었고 기름 붓는 일이 금지 되었으며 매 식사 전에는 찬물로 목욕을 해야 했고, 죽은 동물을 가까이 하지 않고 옷도 식물성 섬유로 된 옷을 입었다.
4. 열심당
이들은 공물이나 세금을 바치는 일이 참된 왕이신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라 하여 로마 황제에 대한 조공에 반대했다. 파이퍼(Robert Pfeiffer)에 의하면 “바리새파가 하시딤의 후예이듯이 열심당은 마카비 일파의 후예다”라고 한다.
이들은 마카비 일가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율법에 열심을 내었던 것을 본받았기에 열심당이라고 불려 졌고, 또한 하나님의 율법에서 떠난 이스라엘을 보며 하나님에 대한 열심을 보여준 비느하스(민 25:11)의 본을 좇는다고 믿었다.
이들은 A.D. 66-73에 있었던 전쟁에 매우 활동적이었으나 A.D. 73년 5월, 마사다의 마지막 요새가 함락되면서 그 활동의 종지부를 찍었다.
제 3 부 중간사 시대의 유대문헌
1. 히브리어 구약성경의 헬라어역
A.D. 1세기 경 애굽에는 거의 1백만의 유대인이 거주하였고, 알렉산드리아의 5개 구 가운데 2개 구가 유대인의 구역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들은 이곳에서 곧 팔레스틴에서 사용하던 아람어를 잊어버리고 대부분 헬라어를 사용하였다. 따라서 이들이 구약을 사용하게 될 경우 번역본이 필요했으며, 히브리어가 상용어로 살아있지 못하자 팔레스틴과 바벨론에서 아람어 탈굼역이 필요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애굽에 살던 유대인들은 헬라어역의 구약성경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들의 필요에 의해 탄생된 히브리어 구약의 헬라어 번역본인 70인경은 헬라화된 유대인 문학의 뛰어난 산물이라 할 수 있다.
70인경은 구약의 본문 비평에 있어 중요한데 이것은 70인경이 신약을 해석하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헬라어 구약성경은 신약의 저자들에 의해 채용된 사상의 세계와 어휘들을 제공해 주고 있다. 이것은 신약의 종교적인 용어들이 궁극적으로 헬라어 세계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라 70인경의 헬라어를 통해 전달된 구약의 히브리어에서 유래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2. 사해 동굴에서 발견된 문헌들
유대교와 기독교에 있어서 커다란 중요성을 지닌 놀랄 만한 고고학적 발견이 사해의 서안을 들어가는 계곡의 동굴들에서 있었는데, 각기 다른 다섯 곳에서 발견된 필사본들은 쿰란의 공동체 자체에 대한 환한 빛을 던져줄 뿐만 아니라 당시의 사고와 성경본문의 특성,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파하셨고 기독교회가 형성되었던 성경해석의 발생배경, 당시 역사의 다양한 면모들에 대한 가치 있는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다.
사해 두루마리란 용어는 1947년 이래로 사해의 몇 계곡에 위치한 동굴들에서 발견된 많은 문헌들을 말하는 포괄적인 명칭들인데, 사해에서 발견된 두 번째 자료의 무더기는 1951년 헤브론 동편의 사해로 들어가는 와디 다라야 지방의 한 곳인 무라바아트의 두 개의 동굴에서 발견되었다. 이들의 연대는 로마의 통치기간으로 올라가며 대부분 바르 코흐바에 의하여 일어났던 제 2의 유대인 반란과 관계있는 것들이다.
1962년에 예루살렘 구도시에 아랍인들이 여리고 북쪽으로 잘못 전해진 요단강의 절벽에 있는 한 동굴에서 문서들을 발견하였다는 사실에 미국동양연구학회가 근처의 동굴들을 탐사하여 발견한 아람어 파피루스의 연대는 B.C. 375~335년경으로 추정되고 있고 이것은 팔레스틴의 역사를 연구하는 역사학자들에게는 매우 의미 있는 일이었다.
현재 유용한 성문화된 자료의 상당수는 제1, 제4, 제11 동굴에서 발견된 것으로 제1 동굴은 최초의 두루마리들을 전해주었다.
또한 다른 쿰란의 동굴들은 성경적 자료들과 성경이 아닌 히브리어와 아람어 사본들 274개의 단편들을 전해주었다. 특히 제11 동굴은 현재 팔레스틴 고고학 박물관에 소장된 많은 단편들과 약간의 두루마리가 발견되었고, 150개의 시편 중 많은 것을 포함한 두루마리와 원 히브리 문자로 기록된 레위기 등이 발견 되었다.
3. 외경과 위경
구약의 외경은 길이와 주제, 표현방법이 각기 다양한 14권을 일컫는 것으로 많은 영어역 성경들이 수록한 외경의 순서는 흠정역(King James)의 번역자들이 익숙한 구약의 라틴어역을 따르고 있다.
유대인들은 두 개의 구약 정경, 곧 팔레스틴 사본(맛소라 사본을 따르는)과 알렉산드리아 사본(70인역을 따르는)을 가지고 있지만 알렉산드리아 유대인들이 외경 가운데 어떤 책도 정경으로 간주한 증거는 전혀 없지만 헬라어를 사용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아마 외경이 구약 정경의 일부를 형성하였다는 이유로 외경에 정경적 지위를 주었다.
70인경에서 외경에 속한 책들(에스드라 2서 제외)은 항상 정경적인 책들과 나란히 동일 계급으로 취급되었지만 전통적인 유대인이나 개신교 신자들은 외경 가운데 어느 한 책도 정경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종교개혁 시대에 있어 개신교와 로마 카톨릭은 외경에 대하여 서로 상이한 태도를 보였는데 트렌트 종교회의는 다양한 외경들의 정경성을 주장하였고 이것이 1870년 바티칸 회의에서 재확인된 바 있다.
그러나 루터는 외경 가운데 그 어떤 책의 정경성도 인정하지 않았으며, 단지 그것들을 모두 구분하여 구약과 신약 사이에 위치시키는 일을 단행하였다.
성경에서의 외경의 제거는 한 제네바 성경에서 외경을 생략시켰던 청교도의 영향으로 돌리고 있다. 그리고 1629년 흠정역의 어떤 판에는 외경이 없이 출판이 되었고, 1827년 이후 점차 외경은 무시되고 경시되어 왔다.
그러나 비록 외경이 영감된 정경의 일부는 아니라 할지라도 이 책들은 정치적인 면에서나 문학적, 역사적 면에 있어 대단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또한 외경들은 종교적인 측면에 있어서도 그리스도의 탄생을 전후한 세기들 동안에 있었던 유대인의 영적이며 철학적, 지적 생활에 대한 통찰력을 제시해 주고 있다.
4. 요세푸스와 그의 저작들
요세푸스는 가이사 칼리굴라가 즉위한 해에 태어났는데 그의 부친은 제사장이었으며, 어머니는 하스모니안 지도자인 요나단의 후손으로 왕족이었기 때문에 그는 뛰어난 교육을 받았으며 헬라의 학문과 문화를 소개 받았고, 매우 어린 나이에 유대의 율법과 문학을 교육받았으며 이미 16세 때 유대의 주요 종파인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의 회합에 참석하였고 이들 모두의 교훈을 배웠다.
그의 주요 저작으로는 유대 전쟁사와 유대 고대사 등이 있는데 『유대 전쟁사』는 모두 7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안티오쿠스 에피타네스로부터 헤롯 대왕에 이르는 기간, 로마군과의 초기 전쟁에서 발생한 사건, A.D. 67년의 갈릴리 사건, 예루살렘 포위 때까지의 전쟁, 예루살렘의 봉쇄와 함락, 반란의 여파 등을 다루고 있으며, 『유대 고대사』는 유대 전쟁사가 출판된 지 16년 후에 출판된 것으로 초기에서 A.D. 66년에 이르는 유대의 역사를 5가지로 구분하여 선사시대부터 포로기까지, 고레스의 시대, 알렉산더 대제부터 헬레니즘의 발현, 헤롯의 사후에서 A.D.66년의 전쟁 발발까지를 다루고 있다.